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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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다리가 금강 철교이고, 뒤에 백제큰다리, 강 건너 보이는 산이 취미산(취리산으로 추정)이다 |
금강 철교와 배다리
금강에 철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나루터가 발달했다. 공산성 끝자락에는 장깃대 나루가 있었고 창벽 앞에는 창벽 나루가 있었다. 공주가 발전하자 금강을 건너는 사람들과 물자가 크게 늘면서 그동안 사용하였던 나룻배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나무다리를 놓았지만, 홍수가 나면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래서 만든 것이 배다리였다. 1890년대에는 공산성 인근에 만든 산성교라는 배다리가 유명했는데, 배 25척을 묶고 판을 얹은 이 다리는 폭 3m에 길이 150m로 어찌나 튼튼했던지 1910년대에는 자동차도 지나다녔다. 하지만 이 다리도 오랜 세월과 큰 홍수를 견디지 못했고 마침 1932년 충남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는 대가로 금강에 다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금강 철교였다. 그때부터 금강 철교가 공주의 관문이 되었고, 1933년에 세운 금강 철교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공주는 서울과 목포를 잇는 국도 1호선이 통과하는 주요 지점이다. 다리가 세워지자 공주의 강북이 개발되기 시작해서 공주의 강남은 공산성이 있는 백제의 고도이고 강북은 일제 이후 개발되기 시작한 신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좁아서 편도 1차선, 일방통행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공주 시민 마음속에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취라산회맹
백제가 멸망하고 5년이 되던 665년에 신라의 문무왕과 웅진도독(백제) 부여융, 당나라 사신 유인원 세 사람이 공주의 취리산에 함께 모여 앞으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자고 맹세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 취리산은 지금의 공주생명과학고 뒷산인 취미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형제처럼 사랑하고 고난이 닥쳤을 때 서로 돕고 함께 극복하자고 맹세하고 서약문은 신라의 종묘에 보관했다고 하지만.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신라는 백제 사람들의 저항을 막고 당나라를 몰아내고자 함을, 백제는 멸망한 나라를 되찾고자 함을 숨기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공산정
공산정은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있어 공산성 안에 있는 공북루를 비롯한 백제 왕궁 관련 유적과 유유히 흐르는 금강, 금강 철교 등 공주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 낙조와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공산정에 대한 기록은, 18세기 후반의 충청 도읍지 공주목 지도를 보면 ‘후락정’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공산정은 1970년대에 새로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렀다. ‘공산정’이란 이름은 시민 공모를 거쳐 지은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2층 누각 형태로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데 날아오를 듯한 모습으로 정상에 솟아 있다. 공산정에서 바라보는 해넘이는 장관이어서 매일 저녁 일몰 시간이 되면 많은 시민이 공산성을 오르고 있다.
공산정 해넘이와 공산성 야경을 마지막으로 공산성 소개를 마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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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정의 해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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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금서루, 공산정, 무령왕 동상의 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