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 시대의 개막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웅진 시대는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전사하는 정신없는 상황에서 문주왕이 급히 웅진을 수도로 정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북방을 보호하는 금강과 공산성은 천연적인 방벽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웅진 시기는 63년 동안으로 그치고 마는데, 이는 5명의 왕 중에 문주왕과 동성왕은 권신에게 시해당하고, 삼근왕은 어린 나이에 석연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죽었고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긴 뒤에 관산성 싸움에서 전사하였기에 결국 천수를 누린 것은 무령왕뿐이었을 정도로 웅진은 불안한 곳이었다는 것도,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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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산문 |
웅진 시대 왕들은 공주가 사방이 산으로 싸여 있는 방어 도시라고는 하지만 그 자체가 고립된 곳이고 수도로서는 협소했다. 사회가 안정을 되찾자 웅진이 세력을 뻗어나가야 할 국가의 수도로서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더 넓은 평야로 진출하여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고 수운이 편리해서 외교와 국방을 강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 웅진 시대 왕들의 꿈이었다. 결국, 백제 성왕이 이 꿈을 사비 천도로 푼 것이었다(538년).
천도의 꿈
천도의 꿈은 이미 동성왕 때부터 부여를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 사냥을 겸하여 부여 지역을 살피고 있었고 부소산성 동문 터에서 ‘대통’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됨으로써 사비성 축조 연도가 이미 양 무제 대통 연간(527~528)에 진행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부여는 금강 변에 있으면서도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도 적합했지만, 웅진보다 금강의 하류 지역이어서 수운 교통상,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편리했다. 홍수 때 범람원으로 약점도 있었지만 넓은 평야를 끼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고, 호남평야의 경영이나 가야 지방으로 진출하는 데도 유리했다. 그래서 조정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하류의 비옥한 땅 대신 호남의 기름진 곡창 지대를 새롭게 개발함으로써 보상받으려 했다.
계획도시 사비도성
사비도성은 부소산성을 배후에 두고 외곽의 요충지에 부분적으로 나성을 쌓아 방어체제를 이중으로 견고하게 다졌다.
사비도성이 철통같이 튼튼하고 완벽한 성(철옹성, 금성탕지)이 된 것은 아니지만 웅진의 공산성보다는 취약점은 극복되었다.
그리고 사비도성은 웅진 시대 공산성 내에 왕궁이 구축된 것과 달리, 왕궁은 부소산성 아래 남쪽(관북리 추정)에 넓고 크게 지었다. 부소산성은 평상시 왕궁의 후원으로 사용되다가 유사시에는 부소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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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산성 바로 아래 남쪽 관북리 지역에서 대규모 건물터를 비롯한 왕궁지로 추정되는 넓은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
시가지는 크게 5부로 나누고, 각 부는 5항으로 다시 나뉘면서 정연한 체제를 갖춘 계획도시로 세워졌다. 사비로 천도하는 시기는 극심한 전란기였는데 천도를 시도한 성왕도 천도 후 16년째 되던 554년 신라군과의 관산성 전투(옥천)에서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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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소산성 내 반월루에서 바라본 부여 시가지 모습, 우측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있다. 공주보다는 넓은 들과 바다로의 진출이 용이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