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 그림에 담긴 소중한 이야기(고 박동규 선생님께 부쳐)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필자에게는 낙화암의 애틋한 사연만큼 소중한 이야기가 담긴 낙화암을 그린 그림 한 점이 있다. 고등학교 은사님으로부터 받은 그림인데, 그 그림은 우리 집에서 칙사 대접을 받으며 2층으로 가는 계단에 소중히 모셔져 있다. 그곳은 아들이 독립하기 전까지 살았고, 가끔 집에 들르면 머물다가는 아이들의 공간으로 남아있는데, 그림이 그곳에 있는 이유가 있다.
2008년 설날쯤으로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명절 때마다 혼자 계신 은사님을 뵙고 잠시 인사드리곤 했었는데 그날은 유독 독촉 전화까지 하셨다. 선생님은 몇 년 전 정년 하신 후 서울에서 형님이 계신 대전으로 홀로 내려오셨다고 하셨다.
이후 몇 차례 만남에서 이혼하시고 임대 아파트에 혼자 계신 것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폭음을 하고 계신 것도 알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오셨지만,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서운해 안쓰러운 투쟁을 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한동안은 전공(체육 선생님)을 살려서 동네 게이트볼 대표선수가 되었고, 동 대항 경기에서 우승했다며 자랑하던 모습에서 어려움을 잘 이겨내시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었다.
한 번은 칠순 잔치를 하신다기에 화환을 보내고 가 보니, 제자는 나뿐이고 아들과 따님, 형님 내외분이 전부였던 썰렁한 분위기에‘선생님 은혜’ 노래를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새삼 떠오른다.
집에 들어서니 10평 임대 아파트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가구가 하나도 없고, 테라스에는 댓병짜리 빈 소주병만 뒹굴고 있었다. 선생님은 싱크대에서 김치를 썰고 계셨다. 당분간 아들 집에 다녀오시게 되어 가구를 정리하셨단다. 소주와 김치만 얹힌 알루미늄 소반을 내려놓으시며 이리 와서 앉으라셨다. 차를 가져와 술을 못한다고 해도 오늘따라 막무가내셨다.
몇 잔이 돌고 나서 선생님이 이야기를 꺼내셨다.
“오늘 내가 너를 찾은 이유가 있다”라시며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떼어 방바닥에 내려놓으시란다. 동양화였다. 일어나 떼어놓고 보니 벽에 걸렸던 자국이 선명하게 얼룩져있었다. 선생님은 그림을 가리키며 “내게 남아있는 것 중에 가장 값나가는 것이야, 그 그림을 내려놓고 술을 마시면 그림 속 배를 타고 마시는 느낌이 들어, 자 한번 그런 생각을 하고 마셔봐라. 그렇지? 이 그림은 몇 년 전, 형님에게 축하드릴 일이 있어 고향인 부여 낙화암을 그려 달라고 지인인 화가에게 부탁해서 받은 낙화암 그림이지. 그런데 그림이 너무 좋아 형님에게는 다른 선물을 해드리고 내가 즐기고 있지. 오늘 문득 너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를 부른 게야. 오늘 술 마시고 갈 때, 가지고 가거라.” 깜짝 놀란 나는 한사코 가져갈 수 없다며 손사래를 쳐 보았으나 선생님은 덤덤히 말씀을 이어 가신다. “예부터 제자가 선생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지 선생이 제자에게 선물하는 법은 없지만, 너에게 주는 이유는 평소 선생에게 잘한 너는 충분히 받을만한 자격이 있고, 네 아이들에게 교육 차원에서 가르침을 주고 싶어 주는 것이니 아이들 방에 걸어두거라. 그리고 이제 술자리도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라”라고 하시며 그림을 현관 너머 복도에 내놓고, 쫓아내시며 문을 걸어 잠그셨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혼쭐나게 핀잔을 듣고 다음 날 그림을 들고 찾아가 보니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선생님이 서울로 올라가신 것이다. 선생님의 서울 연락처를 수소문하던 중 지역 치과의사들과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고 돌아오던 날 선생님의 부음을 듣게 된다. 내 머릿속은 그림을 뗀 빛바랜 벽지처럼 하얗게 식어 내렸다. 그것이 선생님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던가. 이미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나를 찾으셨던 것이었고, 잠시 마실 가시듯 떠난 서울 길은 모든 것을 알고 떠난 머나먼 길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이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아들 너머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해져야 한다는 바람으로 아이들 방 앞에 걸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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