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산리사지 석조 사리감(국보)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1993년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견되자, 계단식 논이었던 나성과 능산리 사이 골짜기에 시선이 집중되면서 추가 발굴조사가 시작된다. 결과, 이곳은 백제 왕릉에서 잠들어 있는 왕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임이 드러났다. 그러던 중 1995년 10월에 4차 발굴조사에서 절터 가운데 목탑지 심초석 외부 하단에서 사리장엄구를 보관하던 화강암으로 만든 감실인 석조 사리감(국보)만 사리장엄구 없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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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조 사리감은 발견 당시 심초석 외부 하단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
사리감은 전체 높이 74cm, 너비 50cm이며, 사리감의 가운데 높이 45cm, 너비와 깊이는 약 25cm인 큰 터널형 감실이었다. 감실은 바윗돌을 두 단으로 파내려 가서 조성했는데 안쪽 단에는 사리 장치를 모시고 바깥쪽 단에는 작은 문을 설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리감이나 감실의 윗면은 둥근 아치형이다. 이 절은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폐사된 듯한데 폐사될 때 석조 사리감도 목탑과 같이 훼손되면서 사리장엄구 일체도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석조 사리감의 명문
석조 사리감은 외형만 보면 적당히 모양을 다듬은 바윗덩어리나 다름없는 데다 사리감 내부에 모셨던 사리장엄구도 없어졌기 때문에, 국보로 지정된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유물은 사리감 전면에 20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역사적 가치를 높게 인정받고 있다. 이 명문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새겨진 글씨와 비슷한 남북조시대의 북조계 서체(예서)인데 내용을 해석해 보면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567년)에 왕의 누이인 공주가 공양한 사리’라는 뜻이다. 여기서 창왕은 성왕의 아들 위덕왕을 말한다.
명문의 가치
현재까지 남아있는 백제의 명문은 매우 드물지만, 이 명문은 확실한 백제의 글씨로 1971년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무령왕릉 지석, 무령왕릉 은팔찌에 새겨진 명문 등에 이은 두 번째 발견이라는 점과 절의 창건연대를 확실하게 했다는 점과 공양자를 명확히 밝혀 주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배가된 것이다. 또 능산리사지 석조 사리감은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곳에서 약 20m가량 떨어진 가까운 곳에서 발견되었기에 향로의 제작 시기도 비슷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절의 이름은 여전히 모르지만, 명문 덕에 어떤 이유로 창건된 사찰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아 유물이 발견되고 곧바로 1996년 5월 30일에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장치
창왕은 554년에 왕위에 올랐으니, 창왕 13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567년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사리장엄의 서막을 열어준, 가장 오래된 사리장치라는 특별한 의미까지 있는 유물이다. 게다가 심초석과 별도로 제작된 사리감의 안치 방식은 지하 심초석 일부에 사리공을 낸 왕흥사식(577년)이나, 지상에 있는 심초석 중앙에 사리공을 둔 미륵사식(639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백제 사리공양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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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리감 전면에 새겨진 명문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