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지 사리기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2007년 왕흥사 목탑 터를 발굴하던 중, 탑 중심기둥의 기초인 심초석을 발견한다. 그 심초석에서 뚜껑이 있는 사리공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바깥부터 청동제의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제 사리호, 그리고 보다 작은 금제 사리병을 3겹으로 겹쳐 봉안한 사리기가 나왔다. 불교 경전에 보면 사리를 탑 안에 넣을 때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재료의 사리용기를 겹쳐서 사용하는데 안쪽으로 갈수록 귀한 재료로 용기를 만든다고 한다. 왕흥사지 사리기도 경전 내용을 따른 백제 사리장엄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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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으로부터 청동제사리합, 은제사리호, 금제사리병 |
이 사리기는 전반적인 형태와 세부 구조물을 주조하고 접착한 기법과 표면을 깎고 다듬는 기법 등에서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백제 장인의 숙련된 솜씨를 엿볼 수 있었고, 특히 단순하고 단아한 형태와 보주형 꼭지, 그 주위를 장식한 연꽃 문양 등을 통해 525년 조성한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 등의 영향을 받고, 7세기 전반 미륵사지 서석탑 사리기에 조형적으로 영향을 끼친 6세기 후반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청동제 사리합
청동제 사리합은 바닥이 납작한 원통형으로 몸체 위, 아래로 두 줄의 음각선을 둘렀고 사리함 뚜껑에도 두 줄씩 음각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 넣었다. 뚜껑 중앙에 솟아 있던 연봉형의 손잡이는 부러진 채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복원되어 있다. 이 사리합 외면에는 제작연대와 조성 이유 등을 말해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사리기의 가치를 한층 높였다.
은제 사리호
청동합에 넣었던 은제 사리호는 긴 목 아래 둥근 몸체와 낮은 굽을 지닌 호의 모습인데 목 부분에 접합한 흔적이 보이는 것은 금제 사리병을 안치하기 위해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 나중에 접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몸체의 안쪽 바닥에는 별도의 받침대가 있는데 은제 사리호 내부에 안치되는 금제 사리병이 움직이지 않도록 만든 것이다.
금제 사리병
가장 안쪽의 굽 달린 금제 사리병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볼록해지는 호리병 형태로서 가장자리에는 음각선이 한 줄로 새겨져 있다. 뚜껑 가운데로 보주형 손잡이가 솟아 있으며 역시 주위에 6엽의 연잎을 새겼다.
청동제 사리합 명문
가장 바깥 사리기인 청동제 사리합에는 6행 29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글 내용으로 577년(정유년) 2월 15일 창왕(위덕왕 24년)이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세우고 목탑에 사리기를 넣은 사실이 적혀 있었다. 왕흥사 사리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기로 알려져 있다. 왕흥사지라는 출토지가 분명하고 청동제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577년 위덕왕 때 제작한 사실을 알 수 있고 삼국사기 등의 문헌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명문이다. 명문에는 사리기에 사리를 넣었다고 했지만, 실제로 사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 정유년이월십오일백제왕창위망왕자입찰본사리이매장시신화위삼’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절)을 세우는데 사리 2매를 묻으려 하자 신의 조화로 사리가 3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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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제 사리합 표면에 새겨진 29자의 명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