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지켜낸 인물 기산 박헌봉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근대 문화재 수난사 속에서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희망을 부여잡고 우리 문화를 지키는데 전 재산은 물론 자신의 모든 열정을 평생 쏟아부었던 선각자 몇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중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을 지키고 가꿔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기산 박헌봉 선생님부터 소개하고자 한다.
■남사마을 명문가의 아들 기산 박헌봉
기산 박헌봉 (1907~1977) 선생님께서는 1906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나셨다. 지금은 남사마을 혹은 예담마을(명문가들이 많아 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고, 예쁜 담장이 있어 붙여진 이름)로 알려진 곳이다. 명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는 한학 공부를 했으나 아홉 살이 되던 어느 날, 서당에 다녀오는 길에 민요를 처음 접하고 국악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21년에 상경하여 1923년에 중동중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게 된다.
■국악계의 큰 스승
그는 진주의 명인 명창들에게 민속악을 배우고, 청년기에는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해 민족음악 부흥에 헌신했다. 국악의 경전이라는‘창악대강’을 저술하여 국악 이론의 기틀을 마련했고, 1934년 진주 음률연구회를 만들어 풍류와 민속악을 연구하고 2년 후 상경하여 국악의 여러 분야를 섭렵하셨다. 1941년 조선음악협회에 조선악부를 창설하고, 해방 직후 국악건설본부를 만들고, 1947년에는 대한국악원의 원장으로, 또한 국악 최초의 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 1960)와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을 만들자, 그의 이름 앞에는 국악계의 큰 스승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기산이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면서 건학이념에 전통음악의 정체성은 민속 음악에 있음을 넣어 이를 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밝혔다. 일제강점기의 민족 말살 정책과 서구문화의 난입으로 전통예술이 수난을 받는 역사 속에서 우리 민속 음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계승해서 창조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하신 것이다.
■박헌봉 선생님 업적
그 과정에서 전국에 산재한 민족예술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도록 노력했으며, 특히 우리 겨레의 정서가 담긴 민요가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전국을 돌며 총 274곡의 민요를 채집하였다. 게다가 자료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KBS를 통해 방송함으로써 일반인에게 민요를 널리 보급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는 민속 문화에 대한 가치를 재인식하고 문화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전승이 그칠 위기에 놓인 예술 종목들을 무형문화재에 등록되는 데 앞장섰으며, 능력을 갖춘 예능 보유자 인정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음악 교사들을 위한 국악 강습, 민속 음악 교과서 편찬, 국악관현악단의 창설, 악기 개량 사업 등 한국음악사에 남긴 업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업적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2000년대에 이르러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추진되고 2013년에는 고향인 산청군에 ‘기산 국악당’이 건립되면서‘기산 국악제전 및 전국 국악 경연대회’ 등 선생님을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잇고자 여러 행사를 추진하게 되었지만, 암흑 같던 시절 국악을 지켜 내려던 선생님의 고귀한 뜻을 품기에는 아직도 부족함이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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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남사마을에 있는 ‘기산 국악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