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부여박물관(야외 전시장) 1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금강을 따라 걷던 발길은 금성산 아래 부여 인근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모아놓은 국립부여박물관으로 향한다. 국립부여박물관 주차장에서 전시관으로 가는 길은 석조 옥외전시장을 거북모양의 비석받침, 불 보살상, 돌수조(석조), 불교 건축부재, 돌 가공품 영역으로 나누어 부여 인근 지역에서 출토된 석조물들을 옹기종기 모아놓고 전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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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물관답게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앎)이라는 표지석을 입구에 세우고 현대식으로 지은 박물관은 공연장, 어린이박물관과 전시실을 두루 갖추고 지금은 국보 전시관을 증축공사를 하고 있었다. |
전시실로 올라가는 길 양옆으로 야외 석조물들이 충청도 부여 인근 지역에서 수집되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 중요한 전시물 몇 점만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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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 소나무는 동서고금 어떤 것과의 조화에서도 자체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주의를 더 돋보이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박물관의 현대식 건물이나 불보살상군 등 야외전시물과의 어울림도 훌륭하다. |
당유인원기공비(보물)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새긴 비인데 부소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비문에는 유인원이 당나라 고종에 발탁되고 소정방과 백제를 멸망시킨 사실과 백제 부흥 운동을 평정한 행적은 나타나 있으나 그 이후는 지워져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비문에는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 운동의 주요 내용과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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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유인원기공비(보물) |
성주사지 출토 비석머리(螭首)와 비석받침(龜趺)
비석의 머릿돌은 용이 새겨져 있어 이수라 부른다. 당나라 때 확립된 이러한 모습의 이수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주어 신라가 통일한 후에 귀부, 몸돌, 이수로 이루어진 비석을 만들게 된다. 비신과 별도로 만든 우리 이수와 달리 중국의 이수는 비신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구산선문 중의 하나인 보령 성주사터에서 발견된 이 이수는 특이하게도 반룡(아직 승천하지 못하고 땅에 서려있는 용)들이 서로 얽힌 모습이고 비석의 이름을 적는 제액이 특이하게 원형으로 되어있다. 구산선문 중하나인 보령 성주사지에는 888년 입적한 무염의 비석이 남아 있고 이수와 제액의 형태가 변형된 것으로 고려시대 성주사에 주석하였던 선사의 이수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당나라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든 비석의 받침(귀부)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어 귀부라고 하는데, 태종무열왕릉비와 같이 초창기 귀부는 거북 머리를 하고 있었으나 9세기 중엽부터 용머리로 변한다. 위의 이수와 하나의 세트로 추정되는 이 귀부는 머리와 몸 일부가 없어졌지만, 다리와 등 모양이 사실감과 박진감을 느낄 수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모든 유물은 발견된 장소가 확실하면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보다 발견된 성주사지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그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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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사지 출토 비머리(이수螭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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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사지 출토 비석받침(귀부龜趺)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