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수난사5 신라 서봉총 금관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금강이 품은 백제 유적’을 소개하면서 간간히 소개해온 문화재 수난사가 다섯 번째를 맞는다. 신라에서는 마립간 시대까지 황금은 영원하다고 생각해서 죽어서도 영원히 살아갈 생명을 위해 불멸의 금으로 시신을 치장하였다. 8~9세기 견문록을 모아서 12세기에 아랍의 이드리시가 쓴 ‘천애횡단 갈망자의 산책’이라는 책을 보면 ‘신라에는 금이 너무 흔해서 개의 목걸이도 금이다.’라는 구절도 나온다. 그런 환경에서 세계에서 발굴된 10개의 금관 중 8개가 우리나라 것이니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서봉총의 발굴
그중 서봉총 금관이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와 치욕을 당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때는 1926년 대구에서 경주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협궤 열차를 광궤 열차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하며 경주역 내에 고추밭 자리를 기관차 차고로 만들다가 신라 고분을 발견하게 된다. 고분 발굴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마침 스웨덴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신혼여행차 일본을 방문하였고, 일본은 고고학자인 황태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일본 땅인 조선에서 고분이 발견되었으니 가 보자고 하면서 그를 위한 이벤트를 재빨리 준비했다.
□ 서봉총 이름의 유래
발굴단은 황금유물을 확인하고 반쯤 노출된 상태에서 수습의 영광을 44세인 고고학자 황태자에게 선사하는 이벤트를 벌인다. 발굴 현장에 뛰어든 황태자는 탄성을 지른다. 각종 구슬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가운데, 금관과 요패 발굴을 황태자에게 제안하자 황태자는 상의를 벗고 발굴한다. 황태자가 무릎을 꿇고 금관을 들어 올린 후 나무상자에 넣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러면서 고분에 스웨덴의 한문 명칭인 서전의 ‘서(瑞)’ 자와 봉황의 ‘봉(鳳)’을 따서 서봉총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집 안에서 남들이 우리 것을 가지고 북치고 장구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슬픈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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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황태자(왼쪽)가 금관을 발굴하는 모습 |
□ 서봉총 금관의 치욕
그로부터 꼭 10년 뒤, 1936년 6월 부산일보에 서봉총 금관에 관한 기사가 났다. 1935년 9월 평양박물관 특별전에 경성 박물관에서 대여한 서봉총 금관, 금제 귀고리 등을 전시했다. 유물반환일 하루 전에 전시회 성공 축하 연회를 기관장을 모시고 기생들과 술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평양박물관장은 서봉총 발굴에 참여했던 고이즈미 아키오였다. 술자리가 질펀해지자 이성을 잃고 차릉파라는 기생에게 다음 날 홍보한다는 이유로 왕관과 허리띠 목걸이에 금귀걸이, 금팔찌, 금반지까지 끼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신라가 망한 것이 935년이니 1000년 만에 새로운 신라 여왕 차릉파가 부활한 것이었다. 이 사건이 평양에서 소문이 나돌면서 사건 9개월 만에 언론에 보도가 되자 식민지 백성들의 공분을 샀지만, 고이즈미는 견책과 시말서만 쓰고 평양박물관장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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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일보에 난 신문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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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봉총 금관은 특이하게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 위에 새가 세 마리 앉아있는 모습을 한 금관이다. 땅의 뜻을 하늘에 전하고 하늘의 뜻을 땅에 전해오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새처럼 왕도 신령한 능력이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솟대 신앙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