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산리사지와 관산성 전투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백제 금동대향로와 석조사리감이 능산리사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라와 백제의 운명을 갈랐던 관산성 전투라는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만 이해하기 쉽다. 간단히 설명하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427년)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羅濟동맹(433년)을 맺었으나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쫓겨오게 된다.(475년) 절치부심하던 백제 성왕은 사비(부여)로 천도하고(538)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는다.(551년) 그러나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와 여라麗羅밀약(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공격하지 않는 대신,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지 않는다.)을 맺고 백제의 한강 유역을 공격해 차지해 버렸다.(553년) 백제 성왕은 분함을 감추고 3개월 뒤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내며 신라를 안심시킨 후 왜에게 원병을 취하며 공격할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전투가 관산성 전투(554년)인데 이로써 120년간 이어져 온 나제 동맹은 깨지고 이 전투에서 진 백제는 몰락하게 된다. 관산성은 두 나라의 수도로 가는 길목으로 군사적 요충지였던 지금의 충북 옥천이었다.
성왕의 치욕
관산성 전투가 벌어지자, 백제는 태자인 부여창(후에 창왕)이 주도하며 나섰으나, 조정은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있으니, 시기상조라며 말렸으나 태자 부여창은 젊은 기세로 전쟁을 이끌었다. 왜, 대가야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해서 초기에 전세를 장악하자 당황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지키던 김무력(김유신의 할아버지)부대를 불러들인다. 이는 여라밀약으로 고구려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았던 신라는 가능했지만, 백제는 병력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 신라의 증원군으로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져들었을 무렵 백제가 관산성을 장악했다고 잘못 전해들은 성왕은 50여 명의 병사만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성왕은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게 생포되고, 이후 성왕은 신라의 노비에게 머리를 베어 죽임을 당하고 머리는 서라벌 북청의 계단 밑에 묻히는 치욕을 당했다고 일본서기는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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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산성의 전략적 위치 및 주력부대인 김무력 부대의 이동 배치는 전투 승리의 원천이 되었다.(사진 나무위키) |
관산성 전투의 의미
이후 백제는 실추된 왕권으로 인한 귀족과의 대립으로 백제 멸망의 한 원인이 된다. 게다가 이 승리로 신라는 562년 가야를 완전히 합병하고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지배함으로써 북으로는 함경도까지 진출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또한 새로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통해 백제나 고구려의 방해 없이 중국과 직접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으니 관산성 전투의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창왕(위덕왕)과 백제 금동대향로,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태자 부여창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전투에 출전을 강행했다가 아버지가 죽자, 죄책감에 왕위 계승을 거부하고 승려가 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왕위에 오른 창왕은 선친 무덤을 이곳 백제 왕릉원에 모셨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신의 죄를 사죄하는 사찰을 왕릉원 옆에 지어드려 위로해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왕을 위해 향을 피웠던 ‘백제 금동대향로’와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과 같은 관산성 전투의 슬픔을 승화시킨 위대한 명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처럼 유물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고적 답사의 별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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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를 갈라놓고 중국과의 직접 교류로 선진 문물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이런 지세를 확고히 한 전투가 관산성 전투이다. (사진 인터넷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