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지켜낸 인물, 석남 송석하(1904~1948)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유형문화재 쪽은 오세창이라는 조선 말엽 선각자의 영향을 받은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이 한국 미술사의 개척자였다면, 무형문화재 쪽은 개화기에 국제적인 시야를 가졌던 선각자 상현 이능화 선생의 영향을 받아 가면극과 전통 민속 연구에 투신했던 석남 송석하 선생이 민속학의 개척자였다. 그들은 1930년 동시대에 민족 문화재 두 분야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민족문화 말살의 위기에서 시대적 사명감으로 헌신하심으로써 문화재를 전승 발전시킬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큰 뜻을 펼치지 못하시고 두 분 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무형문화재의 수호자
석남은 경남 을주군(언양)의 만석군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도쿄상과대학에 재학 중, 민속학에 뜻을 두고 귀국해 전국을 돌면서 민속의 기초 조사를 한다. 그러다 손진태, 정인섭 등과 사재를 들여 ‘조선 민속학회’를 만들고 ‘조선민속’이라는 민속학 연구지를 최초로 발행했다.
그가 경제적 풍요로 독일제 카메라와 노트를 들고 민속놀이, 전통 연중행사와 종교의식 등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겐 큰 행운이었다. 게다가 그는 서민문화와 각종 민예품 수집에 몰두하여, 현지답사를 통한 민속의 기원과 유래를 찾아내는 학술적 고찰에도 열중하였는데, 조사한 자료와 지식을 독점하지 않고 나누려고 했고, 민속학의 중요성을 홍보하는 글을 쓰는 연구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사라져가는 민속놀이를 알리는 행사도 자주 열었는데, 조선일보 주최 전국 농악 경연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그를 매혹시킨 ‘봉산탈춤’을 ‘양주별산대놀이’와 비교하는 무대를 갖기도 했으며, 사리원(봉산군)에서‘봉산탈춤’의 기능보유자들을 모아 백중날 놀이하는 과정과 대사를 촬영해서 방송까지도 하였다.(1930년대) 때마침 백두산 동물 생태를 조사하러 가던 스웨덴 동물학자 베르그만에게 ‘봉산탈춤’을 무비카메라로 촬영하게 해서 유럽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평생의 꿈, 민속박물관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 인류학과를 개설하고, 평생의 꿈이었던 민속박물관도 국립박물관장 김재원의 도움을 받아 미군정청을 움직여 국립민족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하였다.(1946) 이곳의 유물은 일본 수집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만든 조선민족미술관의 도자기, 민화 등 민예품과 석남이 수집한 민속 가면 등을 합친 것이었다.
그는 이곳을 민속 문화의 조사 연구기관으로 키우려 했으나 1948년 45세로 병사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그가 죽은 뒤 박물관 관리가 부실해지고 한국전쟁 후에는 정부의 기구 축소로 폐쇄되면서 가면 등 그의 애장품은 야나기의 수집품과 뒤섞여 국립박물관에 흡수되었고, 진귀한 고서들은 한국전쟁 중 대다수가 없어지고 2,359책만이 간송미술관에 남아있다. 한편 그가 발표한 30여 편의 논문과 글을 묶어 1960년에 매부인 양재연 박사에 의해 ‘한국민속고’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선구자에 대한 예우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시대적 소명을 찾아내고 민족의 유산을 지키는 데 모든 삶을 던져버린 용기와 혜안에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한다. 늦었지만, 1996년에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최근 오민석(전 충남역사박물관장) 등은 ‘민속학자 송석하의 부와 학문’이라는 책을 내고, 송석하의 아버지 송태관은 일본 천황에게 훈장을 받고 서산과 태안 간척지 허가를 받았고, 송석하는 1943년 7월 백두산 천지에서 태평양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에 조선인으로 유일하게 참석한 사실을 밝혀내고 역사적 인물의 제자리 찾기를 주장하였다. 이처럼 우리 앞에는 송석하 뿐만 아니라 친일과 민족주의자 사이에 평가가 엇갈린 지성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들의 공과를 냉철히 분석해 보아야겠지만 여기서 이야기한 공에 대한 것은, 결코 허물 때문에 사라져서는 안 될 업적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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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석남 송석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