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에 깃든 역사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의자왕이 항복한 공산성
황산벌 전투에서 크게 패한 백제는 당군과 연합한 신라군을 사비에서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이곳 공산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이에 태자의 아들 문사가 숙부인 융에게 항복을 권하자 융은 이에 동조하여 조카를 포함한 측근들과 성벽으로 밧줄을 타고 탈출하여 항복하고 만다. 이후 도성의 백성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주둔군을 데리고 와서 항복함에 따라 백제의 사직은 끊어지게 되었다.
고려 현종과 공산성
고려 8대 임금 현종도 공주를 거쳐 간 몇 안 되는 임금 중 한 분이다.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거란족의 침입을 받고 1011년 현종 2년에 급히 전라도, 나주로 피난 가게 되었다. 이때 공주를 거치게 되는데 공주 절도사 김은부가 맛있는 음식과 함께 임금의 옷을 바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 후 거란족이 물러가자 현종은 개경으로 환궁하던 길에 다시 6일 간 공주에 머물렀고 그런 인연으로 김은부의 세 딸을 왕비로 맞이하게 된다.
망이 망소이의 난
고려 때는 금은 세공품을 만들거나 도자기, 종이 등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소’라는 작은 고을이 있었다. 공주에도 ‘명학소’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에 살던 망이, 망소이 형제가 1176년 명종 6년 귀족들의 횡포와 차별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공산성을 점령하고 반란의 본부로 삼았다. 공산성이 다시 한번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 정부는 이들을 달래려고 명학소를 ‘충순헌’으로 승격시켜 주기도 했지만, 불만에 찬 이들은 다시 세차게 일어나 충청도 일대를 휩쓸고 나갔다. 그러나 관군의 반격으로 망이 망소이의 난은 진압되고 말았다.
쌍수정
쌍수정은 인조가 이괄의 난(인조 2년 1624년)을 피해 6일간 일시 파천했을 때, 쌍수(두 그루의 나무)에 기대어 시름을 달래곤 하였다. 얼마 후 왕조를 걱정하던 인조가 평정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그동안 버팀목이 되었던 쌍수에 정3품 통혼대부라는 벼슬을 내리고 금대를 걸어 주고 성을 쌍수산성이라고 하였다. 인조는 공산성에서 이괄의 수급을 받은 후에 환도하였다고 한다.
쌍수정은 훗날 1734년 관찰사 이수항이 삼가정이라는 정자를 세움으로써 쌍수정이 된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다 1970년에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지금 정자 앞에 오래된 느티나무와 말채나무가 한 그루씩 남아 있는데 그것이 쌍수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후 숙종 34년 1708년에 이선부가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성에 머물렀던 장소에 사실을 기록한 비각과 석비를 건립하는데 이것이 쌍수정사적비로 쌍수정 아래에 남아 있다.
인절미의 고향 공주
인절미는 찹쌀을 시루에 익힌 다음 그것을 절구에 찧어 조그맣고 네모나게 잘라 콩고물에 묻혀 먹는 떡이다. 그런데 인절미라는 떡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인조 임금은 이괄의 난을 피해 1624년에 잠시 공주에 피난을 온 적이 있었다. 피난 중에 우성면 목천리 인근에 살던 임 씨가 임금님께 콩고물에 묻힌 떡을 바쳤다. 인조 임금님은 시장하던 참에 연거푸 떡을 몇 개 먹더니 “맛이 있구려. 그런데 떡은 떡인 모양인데 도대체 이름이 무엇이오?”하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떡의 이름이 있을 텐데 아무도 모르니, 그것참 기이한 일이오. 그런데 이 떡은 어느 댁에서 만들었소?” “임 씨 댁에서 만들어 바쳤습니다.” 인조 임금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임 씨라.... 임 씨라.... 그것참 맛이 절미絶味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임 씨가 바친 떡이라 하여 이때부터 임절미任絶味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임절미’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로 바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