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유적 약탈에서 잊으면 안 되는 이름, 가루베 지온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1920년대 경주 일원에서는 가야 고분과 신라 고분들이 도굴되고 있을 때 부여 공주 지역에서는 백제 무덤들이 수난을 겪고 있었다. 러일전쟁 승리 후 한반도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는 한일합방 이전부터 개성을 중심으로 고려 무덤을 도굴해서 일본 본토로 수탈해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심한 욕 중에 ‘굴총掘塚(도굴)할 놈’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조상의 무덤에 손을 댄다는 것은 사회 윤리상으로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이었기에 도굴하는 사람들을 보고 만들어진 말이었다.
교사 가면을 쓴 도굴범 가루베
1920년대에 이미 송산리 고분의 1호에서 5호까지 모두 도굴되고 있었고 1932년에는 공주에서 일본어 교사로서 백제 고분을 연구한다면서 불법적으로 부장품을 파먹은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가루베 지온’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교토에서 골동품점을 열고 빼돌린 부장품을 유통한 가족 도굴팀이었다. 그중에 송산리 6호분의 단독 도굴과 부장품의 독점적인 약탈로 주위에 악명을 남긴다. 1933년 제5호분 바로 옆에 있던 제6호분을 연도 입구의 천장 부근에서 파 들어가서 모든 부장품을 깨끗이 약탈해 갔다. 그는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개를 넣어 안전한지 점검하고 들어가서 송두리째 도굴해 놓고 경찰서에는 이미 도굴당한 고분이라고 신고하여 완전 범죄를 꾀했다고 한다. 송산리 제6호분은 바로 뒤에서 발견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 양식이면서 사면에 사신도까지 그려져 있어 백제가 고구려와 중국과의 교류를 입증하는 중요한 유물이었다.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의 양과 가치를 생각하면 6호분에서도 나왔을 유물을 독식한 교사 가면을 쓴 도굴범 가루베의 소행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뻔뻔한 가루베
이후 그는 강경으로 전근 가서 호남의 유적을 조사 연구한다면서 유물수집을 계속하다가 해방되자 트럭 1대에 수집품을 가득 싣고 대구로 가서 같은 일당이던 남선전기 사장 오구라와 함께 일본으로 유물을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는 유물을 숨긴 채‘백제 유적의 연구’라는 책도 냈고 1969년 죽기 1년 전에 송산리 6호분 관계 사진 자료를 공주고보 제자인 이성철(전 문공부 문화국장)에게 보냈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그 유물과 사진의 행방도 모르고 있다. 이 6호분의 주인을 무령왕의 전 왕인 동성왕이나 바로 뒤의 성왕으로 추정하는데 보통 아래 앞에 있는 것이 나중 무덤이므로 성왕의 무덤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고 1인용 무덤이라 무령왕의 죽은 세자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해방 후 미군정청을 통해 유물의 행방을 묻자 그는 공주박물관에 유물들을 놓고 왔다는 거짓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다행스런 오판
다행인 것은 어설피 배운 고고학자 가루베는 정작 무령왕릉 자리는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5호분과 6호분을 위한 인공 주산의 언덕으로 판단한 그는 그 위에 올라 기념촬영까지 했으니 이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오판이었다. 만약 오판하지 않고 무령왕릉까지 도굴이 되었다면, 찬란한 백제문화는 영영 상상 속에서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5호분과 6호분은 도굴되는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되었고 큰비가 오면 물이 스며드는 바람에 1971년 장마를 앞두고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언덕을 파게 되었는데 그것이 무령왕릉 발견의 계기가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무령왕릉 발굴 1년 전에 죽은 그가 생전에 무령왕릉의 찬란한 유물을 보았다면 배가 아파서 죽음을 더욱 재촉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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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호분과 6호분이 완전도굴된 상태에서 바로 뒤에 붙어 있던 무령왕릉이 가루베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