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공산성1
역사적으로 보면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BC 18년에 세워지고 난 이후 주변 조그만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세력을 확장하더니 마한을 완전히 정복(369년)한 후 고구려 평양성을 침략하는 등 강대국의 면모를 보이다가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이 함락되자, 안전한 장소를 찾아 수도를 급히 웅진(공주)으로 옮기게 된다(475년). 남쪽으로 호남의 넓은 평야가 있어 곡식을 실은 배가 움직이기 좋았고,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가 중국과 일본까지 오갈 수 있었다. 또한, 웅진은 이미 백제 왕실과 친밀한 강력한 귀족들이 살고 있었기에 쫓겨 내려온 백제 왕실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에 좋은 선택지가 되었다.
◇ 웅진 시대의 왕들
백제의 웅진 시대에는 천혜의 요새이자 왕실을 지지할 굳건한 세력이 존재하던 웅진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문주왕, 어린 나이였지만 귀족세력을 억누르려 노력한 삼근왕, 서남부로 영토를 넓히고 국경 방어를 강화한 동성왕, 사회를 안정시키고 중국 왕조와 다시 교류하며 강국임을 선언한 무령왕, 영토 확장과 번영을 꿈꾸며 더 넓은 사비로 천도(538년)한 성왕까지 63년간 백제의 기틀을 다지고 부강한 나라로 재탄생시킨 다섯 왕이 있었다.
◇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
웅진을 지리적으로 보면, 차령산맥의 남쪽에서 병풍을 두르듯 있는 산악지대는 북방을 방어하는 천연적인 요새였고 금강이 흐르면서 형성된 비옥한 평야는 비상시 식량 조달에 많은 장점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역사적으로 공주는 개성 혹은 한양에서 국왕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 첫 번째로 머무르는 피난처가 되었다. 고려 현종(1010)은 거란이 쳐내려오자 처음에 공주에 피난했다가, 전세가 더 나빠지자 나주까지 갔다가 난이 진정되자 개경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공주에 들렀다가 환도하였고, 인조 2년 이괄의 난(1624년) 때 인조도 공주로 몽진했다가 감영에서 이괄의 수급을 받은 후 환도했던 적도 있었다.
◇ 공산성의 역사
공산성은 백제가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후 도성 안에 있었던 왕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혜의 요새로 성벽의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 시대의 성벽은 토성과 석성이 함께 있었으나 지금 모습은 조선 시대에 다시 쌓은 석성의 모습이다. 성의 이름은 웅진성으로 불렀다가 고려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백제 무왕 31년(630년),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고 660년 백제 멸망하기 직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다 연합군에게 체포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 때,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고 조선 후기에는 충청감영이 설치되기도 했다. 성안에는 백제 시대 추정 왕궁터와 임류각과 연지 등 백제 왕궁 관련 유적과 4곳의 문지 (금서루, 진남루, 영동루, 공북루), 쌍수정,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남아 있다.
◇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산성은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유적들은 주변국들과의 교류로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 후기(475~660년)의 유산이다. 웅진(공주) 시기 왕도와 관련된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사비(부여) 시기의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 나성, 또한 수도 사비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금마저(익산)에 만들어진 별궁과 관련된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유적들은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건축 기술을 포함한 문화 예술과 종교 등을 더욱 발전시킨 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주었음을 증명하는 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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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해발 110m)을 둘러싸고 북쪽으로는 금강, 남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만하루, 공사 중인 공북루, 공산정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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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공산성을 들어가는 주 출입문인 금서루와 공주 부근에서 흩어져 있던 비석을 모아 놓은 비석군은 공주의 비중 있는 역사적 위용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