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19세기 말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우리 문화재 수탈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본인 골동품상과 도굴꾼들의 활동은 합방 훨씬 이전부터 자행되고 있었다. 특히 고려의 왕도인 개성 일대의 왕릉을 포함한 고분들이 파헤쳐진 것은, 1905년 전후의 일이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 조상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은, 사회 윤리상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갖은 협박과 무지한 민초들을 매수하여 개성과 강화도 일대의 고려 고분들을 파헤치며 고려자기와 부장품들을 모조리 약탈해 갔다.
청일전쟁(1894~5년)에서 이기고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까지 승리하자 한반도를 제집인 양 장악한 일제는 개성 부근에서 도굴한 고려청자를 서울로 모았다가 일본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도굴품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일본인 수집가들이 생겨나고, 수집해온 고려청자를 일본으로 중개하는 상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려청자 수탈의 원흉, 이토
1906년에 서울에 왔던 미야케라는 변호사는 회고록에 “이토가 닥치는 대로 청자를 수집했는데 절정에 이른 시기는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던 1909년 무렵이었다. 언젠가는 골동품 중개상 곤도의 가게에 있는 고려자기를 모두 사버리자 서울 장안에 고려자기가 동이 난 적도 있었는데 그 당시는 조선의 지식인들조차 고려자기의 실체를 몰랐다”고 증언했다.
1905년 11월에 초대 통감으로 온 이토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천황과 일본의 귀족사회에 선물한다고 실어간 수천 점의 고려청자는 중개상 곤도를 통한 도굴품이었다. 이토는 당시 고려청자의 가치를 잘 모르고 조선의 특산품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통감 재임 동안, 그를 믿고 도굴이 활기를 띠자, 도굴은 개성을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절정을 이루었고 서울과 일본에서는 고려자기 장사와 수집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청자의 최대 장물아비였던 이토는 이완용에게 고종을 위로한답시고 동물원(창경원)과 이왕가박물관을 창설하게 한다.
이는 도굴꾼들에게 장물을 고가로 팔아넘길 수 있는 조선 왕실이라는 우수한 판매처를 제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시 고종은 고려청자라는 것을 처음 보았고 이토에게 어디서 만들어진 것이냐라고, 물을 정도로 고려청자에 대해서는 물론 도굴품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고려청자가 일본에 더 많다
당시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의 고려자기 6천여 점의 99%가 개성 부근에서 나온 도굴품이었다. 이토는 합병을 추진하는 동안에도 수천 점의 고려자기를 수집해서 그중 일품 103점을 메이지 천황에게 진상했고 귀족들에게도 인삼과 함께 고려청자를 선물로 보냈다.
그가 통감 자리를 끝내고 하얼빈역에서 사살(1909년 10월 26일)된 뒤에도 도굴은 계속되었다. 고려청자가 국내의 모든 박물관과 민간 소장품을 합쳐도 약 2만 점에 그치지만 그의 비호 아래 일본으로 빼돌린 것이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약 3만~4만 점이 된다는 전문가들의 추정으로 보면, 고려청자의 도굴과 수탈은 이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선물로부터 야기되었기에 민족 찬탈의 원흉으로만 알려졌던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청자 수탈에 있어서도 원흉으로 밝혀졌다.
민족 말살의 책임을 물어 안중근 의사에게 심장에 총탄을 맞지 않았다면 고려청자의 수탈의 책임을 물어 그들이 아끼는 일본 국보급 도자기로 그의 뒤통수를 쳐서 둘 다 박살이 나도록 날려버리고 싶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 초대 데라우치 총독 같은 권력 실세들의 비호 아래 문화재 수탈은 공주를 포함한 백제 유적, 경주를 중심으로 신라 유적에서도 이루어져 공주 송산리 6호분을 싹쓸이한 가루베와 같은 도굴꾼들이 전국적으로 양산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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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에 의해 천황에게 상납했다가 1965년 문화재 반환 때 돌아와 보물로 지정된 ‘청자 구룡형 주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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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년 일본인으로부터 950원이란 거액으로 이왕가박물관이 사들인 도굴품 ‘청사진사포도동자문표형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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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일본에서 중요문화재(보물)로 지정되어있는 ‘고려청자음각정병’ 도쿄 네즈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