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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02/11  치학신문
금강이 품은 백제 유적 ③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3. 무령왕릉 발굴 현장

 

 1971년 7월 5일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은 기이한 꿈을 꾸었다. 돼지인지 해태인지 모를 괴상한 짐승이 달려드는 꿈이었다. 꿈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현장의 연락을 받고 달려갔더니 벽돌로 된 아치형 구조물이 보였다. 공사를 중단한 채 문화재관리국에 신고하자, 문화공보부 장관은 김원룡 중앙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을 파견했다. 7월 7일 현장에 도착한 발굴단은 이날 밤 큰비가 내려 빗물을 빼는 배수구 공사를 밤늦게까지 해야만 했다. 7월 8일 조간신문에 왕릉발굴 보도가 나가자 구경꾼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오후 3시쯤 무덤 입구가 드러나자 발굴단은 위령제를 간단히 지내고 입구의 막음 벽돌 2개를 들어냈다. 그 순간 무덤에서 하얀 수증기가 새어 나왔다. 밀폐된 찬 공기가 바깥 더운 공기를 만나 수증기로 변한 것이다. 무덤 안에 들어간 두 사람은 아직 개봉되지 않은 처녀분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특히 김영배 관장은 꿈에 본 멧돼지처럼 생긴 돌짐승(석수)을 보고 더욱 놀랐다.


 고고학 발굴사의 최대 사건


 최초로 무덤 안으로 들어간 김원룡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은 20분 만에 나와서 무령왕의 무덤임을 밝힌다. 우리 고고학 발굴사의 최대 사건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당시 주위에는 백제 왕족들의 무덤이 많이 모여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도굴당해 텅 빈 무덤들만 남아있었다. 특히 바로 앞에 있는 같은 양식의 벽돌무덤인 6호분은 일제강점기(1932)에 가루베라는 일인 교사 도굴꾼에 의해 도굴된 상태였기에 더욱 믿기 어려웠다.


 아쉬운 유물수습


 이때부터 모두 흥분하여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보도진들이 앞다퉈 무덤으로 들어가려 하자 질서는 무너지고 촬영하다 청동 숟가락을 부러뜨리는 일도 일어나고, 기자가 문화재관리국 직원의 뺨을 때리는 일도 벌어졌다. 이를 통제해야 할 경찰도 구경꾼 대열에 앞장서는 형편이었다. 발굴단은 발전기 하나에 전등 두 개로 철야 작업에 들어갔다. 밤 10시에 조사를 마치고 자정쯤부터 유물을 실어 나갔고 다음 날 9시에 바닥 청소까지 마쳤다. 처음 무덤으로 들어간 지 17시간 만에 조사와 유물수습을 끝냈으니 쓸어 담았다는 표현이 맞았다.


 과잉충성


 이런 와중에 두 관장은 몰래 중요 유물을 갖고 고속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갔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이 왕비의 팔찌를 휘어보는 바람에 놀랐다는 일화를 남기고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왔으니 국보급 유물을 운송 차량이나 호위 없이 고속버스로 이동한 일은 과잉 충성으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를 TV로 본 공주 시민들은 공주에서 발굴된 유물을 서울로 반출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게 된다. 이후 시민들과 협상 끝에 유물을 전시할 공주박물관 건립과 유물보존처리를 위해 임시로 중앙박물관으로 이송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액운


 7월 16일 무장 경찰들의 호위 속에 유물이 서울로 향한다. 휴게소에 들렀던 문화재관리국장 운전기사가 넘어지면서 정맥이 터져 운전할 수 없게 되었고, 기자에게 뺨을 맞았던 과장의 운전기사는 몇 시간 뒤 서울에서 아이를 치는 사고를 냈다. 이어서 서울대 교수로 복귀한 김원룡 관장은 어쩌다 빚더미로 집을 처분해야 했고 교통사고까지 나자 책상머리에 유서를 써 놓고 다녔다. 고고학계에서는 큰 무덤을 파면 액이 따른다는 말이 입증되고 있었다.


 슬펐던 자화상


 이처럼 졸속으로 처리된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보도진들의 현장 공개 독촉과 시민들의 이상 열기, 경비에 자신이 없었던 경찰 등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그 당시 우리 문화재 관리 수준의 슬프고도 열악한 자화상이었다.

 

 

막음 벽돌을 걷어내자 연도(널길)에 진묘수(석수), 지석(왕과 왕비), 오수전, 청자 등이 나타났다. 벽돌 사이에는 나무뿌리들이 뻗어 나오고 있다(발굴 당시 사진. 국립박물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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