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태 석
대전 기태석치과 원장
2. 무령왕릉
백제는 고구려에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공주)에 도읍하면서 짧게나마 백제 웅진 시기(475~538년)를 보낸다. 이 시기에 5명의 왕이 재위하지만 모두 의문의 죽음, 반란, 전투 중에 돌아가셨고 제 명에 돌아가신 왕은 무령왕뿐이었다. 백제의 웅진 시기는 국력 회복과 왕권 강화를 위한 ‘시련 극복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적처럼 찾아온 선물
웅진 시기 궁궐이나 사찰은 모두 파괴되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유물마저 일제에 의해 도굴되어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 기적처럼 찾아온 찬란한 유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무령왕릉이었다. 1971년 7월, 이미 도굴되어 텅 비어 있었지만, 여름이 되면 물이 스며들어 습기가 차는 송산리 고분군 5, 6호분 보수를 위해 북쪽으로 파 들어가던 중 삽날 끝에 단단한 물체가 닿았다. 무령왕릉이 1448년 만에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무덤 주인이 밝혀진 유일한 삼국시대 왕릉,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무덤, 백제의 뛰어난 공예기술을 보여주는 무덤이었다. 공주 백제왕릉원에는 웅진 시기의 대표적인 왕릉이 모여 있는데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7기가 정비되어 있다. 무덤 양식은 한성 시기 전통인 굴식돌방무덤(제1-4호분)과 중국 남조에서 받아들인 벽돌무덤(무령왕릉과 6호분)으로 구분된다.
발굴조사의 아쉬움과 의미
이 발굴조사는 당시 참여했던 연구자들도 통탄했듯이 시대적 한계 속에서 유물수습이 졸속으로 마무리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발굴조사를 수행할 체제와 충분한 지원을 받을 만한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3차례 추가조사와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해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삼국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 주인과 축조 연대를 알려 준 묘지석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식 벽돌무덤으로 만들어진 무덤 양식은 백제의 국제성에 대한 새로운 연구과제를 제기하면서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사, 나아가 한국 고대사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 된다. 또한, 백제는 678년 동안(BC18~660년) 존속하지만, 웅진 시기는 짧았고(63년) 변변한 유물이 없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무령왕릉의 발굴 이후 백제사에 있어 당당한 위치로 올라선 것은, 물론 삼국의 문화 수준 비교에서도 대등한 위치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진다.
무령왕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무령왕릉 묘지석에는 모두 무령왕이 523년 5월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의 정확성이 입증되었고,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 구조와 베개, 발 받침, 진묘수, 청자 등 수많은 유물로 백제의 대외교류와 공예기술, 상장례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무령왕은 대외적으로 양나라와의 국제관계를 넓히고 “갱위강국(다시 강국이 되었다)”을 선언할 만큼 국력을 회복시킨 왕이었고, 죽어서는 1500년 가까이 침묵하다가 우리에게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온전히 전해주었으니 살아서도, 죽어서도 큰 업적을 남긴 임금임에는 틀림이 없다.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전시
지금(2021년9월~2022년3월 6일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서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 전시회’를 마련하고 발굴된 유물 5,232점(국보 12점 포함) 전체를 전시하고 있다. 필자도 왕과 왕비의 목관 마구리 장식(목재나 상자 등의 양쪽 머리에 있는 면) 등을 비롯해 처음 보는 유물 몇몇을 만날 수 있어 너무 반가웠다. 백제문화를 미처 가까이서 접해보지 못하신 분들은 이번 전시회가 명품 백제문화와 친숙해질 좋은 기회가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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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령왕릉 발굴 당시 입구 막음벽돌을 제거한 후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50년 기념 전시회’ 자료). |